[번역]역도산의 프로레슬러 데뷔 70주년. 프로레슬러 전향의 뒷무대 (2021년 9월 13일. 이가 프로레슬링 통신)



이번에 번역한 프로레슬링 칼럼은 일본의 프로레슬링 정보 블로그 이가 프로레슬링 통신의 글인 역도산의 프로레슬러 데뷔 70주년. 프로레슬러 전향의 뒷무대입니다.


올해 2021년은 일본 프로레슬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역도산이 프로레슬러로 데뷔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인데, 그가 프로레슬러 데뷔를 한 과정을 이야기를 한 글입니다.


어떤 내용일지 보시죠.








1950년 9월 11일, 스모 9월 대회를 목전에 두고 마쿠우치 (*대전표 최상단에 이름이 실리는 스모 선수 계급) 선수가 식칼로 상투를 자르고 은퇴하며 업계를 떠났다.


그 남자의 이름은 리키도잔 (역도산) 미츠히로. 계급은 니시노 세키와케였다.


역도산은 한국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 출신으로, 원래는 한국의 씨름 선수 출신이기도 해서 1940년에 니쇼노세키 베야 (*베야: 스모 도장)에 입문. 1946년 11월에 처음 마쿠우치 계급으로 승진하고, 1947년 6월 대회에서는 요코즈나 (*스모 최고 계급 선수)인 하구로야마, 오제키 계급인 마에다야마, 아즈마후지와 우승 다툼을 벌이고 우승 결승전에도 진출할 정도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승리를 잘 거두지 못해 계급도 세키와케에 머무르는 상태가 이어졌지만, 세키와케에 있는 선수의 갑작스러운 은퇴는 신문으로도 크게 보도되었다. 원인은 이 시점에서 역도산이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는 것도 있어 차별이 원인이 되지 않았고, 오야카타 (*스모 베야의 책임자)와의 금전 문제설이 유력하다.


스모계에서 은퇴한 역도산은 후원자 (스폰서)였던 닛타 신사쿠의 닛타 건설에서 일하게 되고, 자재 부장 포스트로 현장 감독 일을 했지만, 스모에 미련이 남은 것도 있어 매일을 술로 지샜다고 한다.



1951년에 스모에 미련이 남은 역도산은 닛타 사장을 경유해 스모 협회에 복귀 탄원서를 내고, 니쇼노세키 베야하고도 화해하며 연습하러 나가 스모계 복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51년 9월에 종교 단체 '재일 토리 오아시스 슈라이너즈 클럽'의 초빙으로 바비 브랜즈, 오비어 아세린, 닥터 렌 홀, 앙드레 아돌레, 해롤드 사카타, 케이시 파커 등 6명의 프로레슬러가 처음 일본을 찾았다.


브랜즈 등의 목적은 일본 시장 조사로, 하와이 호놀룰루의 프로모터이자 NWA의 회원이기도 한 알 카라식은 프로레슬링이 개척되지 않은 나라인 일본에 프로레슬링이 뿌리내릴 수 있을지, 잘 되면 카라식 본인이 일본 시장에 진출해 구역 확대를 노리기 위해 브랜즈 등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브랜즈는 공개 연습을 가진 후 9월 30일에 GHQ (General Headquarters.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접수된 메모리얼 홀 (구 양국국기관)에서 미국인 레슬러들의 일본 최초의 프로레슬링 흥행을 개최. 흥행은 일본 적집자사가 스폰서가 되어 타이업 되었으나, 프로레슬링 룰은 알려져 있지 않았기도 해서 관객은 재일 주둔 미군과 그 가족이 태반이었으며 일본인 관객은 적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트 클럽에서 술을 마시던 역도산이 싸움을 벌이자, 우연히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눈 사카타와 의기투합한다. 그곳에서 사카타는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러가 될 것을 권했다. 역도산은 스모 복귀를 하려 했기에 거절했으나, 슈라이너즈 클럽에서도 닛타 사장을 통해 역도산에게 권유했고, 닛타 사장도 연습하러 다니도록 권했다. 닛타 건설은 GHQ의 관련 시설의 건설을 청부 받은 것도 있어 역도산은 닛타 사장의 체면을 위해 마지못해 견학했으나, 관심을 가졌는지 얼마 후 연습에 참가하게 되었고, 다른 루트로 엔도 코키치도 연습에 참가했다.


엔도는 유도 선수였지만, 유도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GHQ에 의해 금지되었고, 그 때문에 엔도는 기무라 마사히코와 함께 프로 유도 단체인 국제 유도 협회에 참가했으나 흥행은 부진으로 끝났다. 엔도는 기무라와 야마구치 토시오와 함께 국제 유도 협회에서 탈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카라식의 권유로 호놀룰루의 프로레슬링 흥행에도 참전하게 되었다.


브랜즈도 일본에 프로레슬링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재일 주둔 미군 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보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인 레슬러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역도산에게는 스모 선수 출신으로 세키와케 계급까지 올라간 네임밸류가 있기에 스타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고, 닛타 사장도 스모계 복귀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고 생각해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링 전향을 권유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28일에 역도산은 브랜즈를 상대로 10분 한판 승부 시합으로 데뷔전을 치렀고, 브랜즈의 예상이 적중했는지, 마쿠우치 스모 선수 출신인 역도산이 데뷔함으로서 일본인 관객들도 늘어났고, 역도산은 브랜즈에게 배운 바디 슬램, 햄머 던지기, 토 홀드를 구사하며 크게 선전한 끝에 10분 시간 초과 무승부를 해낼 수 있었다.


14일 요코하마 대회부터 엔도도 데뷔했고, 역도산은 브랜즈와 함께 센다이, 요코스카 등을 돌며 시합. 11일에 도쿄에서 최종전을 펼쳐 역도산은 시합에서 패하지 않지만 이기지도 못하고 모든 시합을 10분 시간 초과 무승부로 마쳤다.


12일에 브랜즈는 미국에 귀국하게 되었지만, 전날 이별 파티 자리에서 카라식도 참석해 역도산에게 새해부터 하와이에서 프로레슬링 수행을 하는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역도산은 스모 복귀 가능성이 남아있기도 해서 협회로부터의 답변을 기다리기 위해 즉답은 피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2년에 역도산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스모 협회로부터의 답변이 왔지만, 역도산의 예상을 크게 배신하는 각하한다는 답변이 떨어져 스모계 복귀는 완전히 꿈으로 끝났고, 역도산은 프로레슬링 하나만으로 해나갈 수 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스모 협회가 역도산의 복귀를 각하한 것은 프로레슬링 데뷔를 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2월에 역도산은 하네다 공항에서 하와이로 프로레슬링 수행을 떠났고, 전날 밤 송별회에는 정계, 재계를 포함해 100명 이상의 사람이 출석했다. 스모계에서도 스모 협회의 데와노우미 이사장, 요코즈나로 출세한 아즈마후지가 출석했으나, 이 아즈마후지도 훗날 프로레슬러로 전향하게 된다.


하와이에 도착한 역도산은 훗날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메인 레퍼리가 되는 오키 시키나의 지도로 맨투맨 특훈을 받았고, 17일에 호놀룰루에서 본격적인 프로레슬러 데뷔를 했다. 그 후에는 샌프란시스코를 전전하고 1953년 3월에 귀국. 일본 프로레슬립 협회 설립을 위해 움직이고, 1954년 2월 19일에 쿠라마에 국기관에서 벤 & 마이크의 샤프 형제가 참전해 탄생 첫 대회가 펼쳐졌다. 당시에는 TV 방송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TV 전파를 타는 것으로 역도산 뿐만이 아니라 프로레슬링 인기가 폭발, 일본에 프로레슬링이 뿌리내릴 계기가 만들어졌다. 브랜즈는 탄생 첫 대회에도 참가해 일본에 프로레슬링이 뿌리내린 것을 제대로 지켜보았다.






브랜즈는 그 후 NWA의 총본산인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샘 머시닉 아래에서 부커가 되어 현장을 관리했지만, 현역 시절부터 알던 사이인 서니 마이어스로부터 일본에서 새로운 단체를 창설하기 위해 선수를 부킹해 주길 바란다는 의뢰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1963년 12월에 역도산이 급사했고, 1966년에 역도산의 태그 파트너였던 토요노보리가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 새로운 단체 '도쿄 프로레슬링'을 창설하려 했다. 마이어스는 이노키의 미국 무사 수행 때 돌봐준 일이 있어 도쿄 프로레슬링 창설에 협력했다.


브랜즈는 마이어스의 의뢰를 받고 당시 아주 인기였던 죠니 발렌타인과 죠니 파워스 등 몇 명의 외국인 선수를 머시닉의 승낙을 받고 도쿄 프로레슬링에 보냈다. 계약할 때는 이노키가 미국으로 가서 브랜즈와 입회했고, 브랜즈도 역도산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이노키의 단체 탄생에 협력하는 것에 인연 깊은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브랜즈는 1970년에 파워즈와 페드로 마르티네스에게 권유받아 함께 출자금을 내 흥행 회사를 설립했으나, TV 방송국이 붙지 않아서 실패. 브랜즈도 약속된 돈도 지불받지 못해 물러났지만, 파워즈와 마르티네스는 그 후 TV 방송국의 후원을 받아 NWF를 창설해 성공을 거두었기에 브랜즈는 속은 형태가 되었다.


실의에 빠진 브랜즈는 미주리 주에 돌아와 프로레슬링계에서 발을 씼고 업계에서 은퇴. 1983년 1월 23일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 NWF는 성공한 것은 처음 뿐이었고, 차츰 저조해지며 얄궃게도 권리는 도쿄 프로레슬링이 붕괴한 후 일본 프로레슬링에 복귀했다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세운 이노키에게 넘겨졌다.



2021년 9월 15일, 16일에 9월 30일에 양국의 메모리얼 홀에서 일본 최초의 프로레슬링이 펼쳐지고, 10월 28일에 역도산이 데뷔한 후 70년째가 되어, 신일본 프로레슬링, 전일본 프로레슬링, NOAH, DDT를 시작으로 하는 각 단체가 모여 이벤트 'LEGACY'를 개최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도산 데뷔의 뒷무대에는 브랜즈의 공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참고자료:

베이스볼 매거진사 '일본 프로레슬링 70년사'

타츠미 출판사 '도쿄 프로레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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