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일본에서 멕시코로 건너간 남자 울티모 드래곤! (2020년 4월 15일. 이가 프로레슬링 통신)


이번에 번역한 프로레슬링 칼럼글은 일본의 프로레슬링 블로그 이가 프로레슬링 통신의 글인 '일본에서 멕시코로 건너간 남자 울티모 드래곤!'입니다.


일본과 멕시코, 미국의 WCW와 WWE에서도 활약했고, 프로레슬러 육성학교 '토류몬'을 만들어 많은 명 레슬러들을 배출한 울티모 드래곤이 어떻게 데뷔했고 어떻게 가면 레슬러인 울티모 드래곤이 되었는지 그 역사를 이야기한 글이었습니다.


평소에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여럿 나와서 번역해봤는데, 어떤 내용이었을지 보시죠.









1988년 7월 29일, 멕시코시티에서 일본인 젊은이가 UWA 세계 웰터급 챔피언에 올랐다.


그 이름은 '아사이 요시히로'.


아사이는 안토니오 이노키와 초대 타이거 마스크를 동경해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입단 테스트를 보고 합격했으나, 이력서에 신장 178cm라고 적었음에도 실제론 170cm 밖에 되지않아 신장 합격 라인에 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합격했다.




하지만 일본 보디빌더 회장으로부터 야마모토 코테츠를 소개받았고, 코테츠도 마찬가지로 신장은 부족했음에도 역도산에게 열의를 인정받 일본 프로레슬링 입단을 허락받은 과거가 있었기에 아사이를 내제자 (*内弟子. 스승 집에서 지내고 일을 도우며 배우는 제자)로서 돌봐주게 되었고, 아사이는 신일본 도장에서 연습을 하게 되었다.



아사이는 코테츠가 코치로 관여하던 저팬 여자 프로레슬링을 관전했을 때 UWA의 대표였던 카를로스 마이네스와 알게 되었고, 코테츠에게 멕시코로 가겠다고 뜻을 밝혔다.


코테츠는 저팬 여자 프로레슬링의 레퍼리겸 코치였던 그란 하마다에게 아사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했고, 하마다의 루트로 멕시코에 건너가 1987년 5월에 UWA에서 데뷔했다.


UWA는 1975년에 창설되어, 전성기에는 역사 깊은 단체인 EMLL (CMLL)을 능가할 정도의 일대 세력이 되었고, 아사이는 UWA 세계 웰터급 타이틀을 3개월만에 잃었으나 일약 에스트레이자 (*스페인어로 '스타')가 되었다.



아사이의 활약은 일본에도 알려졌고, 가장 먼저 참전 요청을 한 곳이 저팬 여자 프로레슬링이었다.


저팬 여자 프로레슬링은 1986년에 창설했지만, 창설 직후부터 경영이 좋지 않았고, 도움을 받기 위해 안토니오 이노키의 전 측근이자 '과격한 주모자'인 신마 히사시 씨와 전 저팬 프로레슬링 회장이었던 오오츠카 나오키 씨를 고문으로 초빙했다.


그런데 신마 씨는 여성 프로레슬링 뿐만이 아니라 남성 프로레슬링과 가라테 등 다양한 격투기를 융합한 격투기 연합으로 재출발하는 구상을 내걸었다. 하마다로부터 아사이의 존재를 알게 된 신마 씨는 재빨리 멕시코로 가서 아사이를 남성부 레슬러로 올 것을 권유했다.


아사이는 신일본에서 수완을 휘두르던 신마 씨로부터의 요청에 매력을 느꼈지만 여기서 일본에 돌아가야하는가하고 고민했고, 당시 잡지 '공'의 편집장이자 '도크토르 (Doctor) 루챠'라고 불린 시미즈 츠토무 씨와 상담했다. 시미즈 씨의 조언을 받은 아사이는 상황을 보기위해 대답을 미루고 멕시코 활동에 집중하기로 했다.


신마 씨는 레퍼리였던 하마다와 코치였던 오니타 아츠시가 링 위에서 대립한 것을 이용해 두 사람을 대결시키는 것을 계기로 남성부를 시작하려 했다. 당시의 오니타는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NWA 인터내셔널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을 차지하는 등 전일본 주니어 헤비급의 톱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나, 왼쪽 무릎 개골 분쇄 골절이 원인이 되어 은퇴,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저팬 여자 프로레슬링의 코치로 취임해있었다.




1988년 12월 3일, 저팬 여자 프로레슬링 링에서 하마다와 오니타가 대결. 그리고 신마 씨는 시합 후 남성부 창설을 발표했다. 언젠가는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해고당해 FREE가 되어있던 고 류마도 참전시킬 계획까지 세워져 있었지만, 신마 씨와 프론트진의 일방적인 결정에 카자마 루미 등의 소속 선수들이 맹반발했기에 신마 씨는 저팬 여자 프로레슬링에서 철수하고 남성부는 사실상 좌절되었다.


하마다와 오니타도 충격을 받고 저팬 여자 프로레슬링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신마 씨는 '신 격투기 연합'을 재검토할 수 밖에 없게되어 루챠만의 단체를 설립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신 격투기 연합'을 포기한 이유는 오니타가 12월에 UWF 오사카 대회에서 대전 표명을 하기위해 방문했을 때 진 신지 사장이 "티켓은 갖고 있습니까"라며 문전박대하며 상대해 주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마 씨는 하마다에게 "아사이를 제대로 잡아둬라"라고 지시했고, 오니타에게는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라"라고 지시를 내 하마다에게 이야기를 들은 아사이도 새로운 단체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신마 씨는 이노키의 스포츠 평화당의 간사장을 맡아 아주 바빴기 때문에 이듬해 봄이 되어도 움직일 낌새를 보이지 않았고, 조바심이 난 오니타는 먼저 나서기로 결의, 오니타가 독자적으로 신생 단체인 FMW를 설립하기 위해 움직였다.


'프로레슬링엔 뭐든지 있다'라고 하여 시미즈 씨를 통해 루챠 부문 선수로 아사이에게 참전 요청을 하고 탄생 첫 대회에 참전할 것을 발표했다. 하지만 시미즈 씨 본인은 오니타의 단체에서 아사이의 매력이 드러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기 때문에 그럴 생각이 없었고, 아사이도 FMW에 하마다도 연관되지 않아 참가할 생각이 없었다.


FMW도 처음엔 격투기 노선을 표방하여 신마 씨도 협력할 자세를 보였지만, 오니타가 데스매치 노선으로 전환하자 신마 씨가 물러나 신생 단체 설립을 위해 움직였다. 신마 씨 본인은 직접 관여하는 일이 없었지만 아들인 신마 히사츠네를 대표로 삼은 '유니버설 프로레슬링 연맹'의 창단이 발표되었다.


하마다도 참가하기로 결정되자 아사이도 오니타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했고 오니타도 신마 씨와의 쓸떼없는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승낙했지만, 신일본에서도 UWA를 통해 참전 요청이 와있었다. 당시의 UWA 회장에 신일본의 사장이었던 사카구치 세이지가 취임해있었고, 블랙 캣을 동반해 멕시코에서 아사이의 시합을 시찰했다.




이 시합에서 아사이는 훗날 '아사이 문설트'라고 이름 붙여진 라 퀘브라다를 처음 선보였고, 아사이의 재능을 보고 1989년 2월 11일 도쿄돔 대회 참전 요청을 UWA를 통해 넣어 쥬신 썬더 라이거와의 대결을 제안했다.


아사이도 라이거와의 대결은 매력적이었지만, 하마다가 "날 따라와 주었으면 한다"라는 말을 들은 것도 있어 신일본 참전 이야기는 하마다가 직접 UWA에 거절을 표하고 유니버설 프로레슬링 탄생 첫 흥행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일본으로서도 이노키와 신마 씨가 스포츠 평화당으로 다시 함께했기에 연결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고, 유니버설에 따라 언제라도 아사이에게 참전 요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89년 3월 1일 고라쿠엔 홀 대회에서 루챠를 중심으로 삼은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이 창설되었고, 일본 진영엔 하마다, 아사이 뿐만이 아니라 FMW에 참가했지만 방향성의 차이로 이탈한 블랙 아이드맨 (훗날의 '게도'), 아키요시 쇼지 (훗날의 '자도'), 몽키 매직 와키타 (훗날의 '슈페르 델핀')도 합류했다.


UWA에서도 하마다의 호적수였던 페로 아과이요, 슈페르 아스트로, 아사이의 호적수였던 네그로 카사스, 블랙맨, 켄도, 슈 엘 게레로, 에스판토 Jr.라는 UWA의 중심 선수들이 참전했다. 이들 뿐 아니라 EMLL에서 리스마르크도 참전해 호화로운 포진을 갖추었다.


탄생 첫 흥행에서 아사이는 아스트로, 켄도와 태그를 맺고 카사스, 게레로, 에스판토와 대결했다. 아사이는 라 퀘브라다를 선보이며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고 하마다의 존재조차 먹어 치워 금세 일본에서도 주목 선수가 되었고, 유니버설 프로레슬링도 대성황이라 그럭저럭의 스타트를 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단체 탄생 후 얼마 지나자 아사이와 대표인 히사츠네 씨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은 큰 경기장을 쓰지않고 고라쿠엔 홀 등 소규모 경기장을 사용했고, 멕시코인 레슬러를 대량으로 초빙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아사이의 성공을 보고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에 입단하는 젊은 선수들도 속출했다. 다수의 선수를 입단시켰기 때문에 경비가 불어나 경영을 핍박하게 되어버렸고, 그 때문에 아사이의 대전료를 낮게 억누르고 있었다.


아사이는 대전료 문제를 포함해 유니버설 프로레슬링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히사츠네 씨는 신마 씨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마다를 에이스로 밀어주고 아사이의 불만을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단체 내에서의 아사이의 영향력은 커져갔기에 하마다라고 해도 아사이의 불만을 억누르는 것이 어려워져갔다.





또, 멕시코에서의 상황이 변해 1989년말에는 여태까지 TV 방송이 되지 않았던 루챠 리브레의 방송이 시작되었고, UWA의 라이벌 단체이기도 한 EMLL은 한 발 먼저 TV 중계를 시작함으로서 TV 루챠 붐이 일어났다.


아과이오를 포함한 UWA의 주력 선수들은 TV 중계가 없어 붐에 늦게 올라탄 UWA에 가망이 없다고 보고 차례차례 EMLL로 이적했다. UWA는 탄생할 때 EMLL에서 대량의 선수를 스카웃 해왔지만, 우습게도 TV 미디어를 손에 넣은 EMLL에 그대로 당하는 형태가 되어 시대를 타는 것이 늦은 UWA는 기울기 시작했다.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은 신마 씨와 마이네스 대표와의 유대가 강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UWA와의 관계를 중시했고, 여태까지처럼 UWA에서 대량의 선수들을 참전시켰지만 EMLL로 선수들이 이적한 영향도 있어 일본을 찾은 선수들도 고정되고 대진표에서도 매너리즘이 생겨났다.


아사이 자신은 쇠약해져가는 유니버설 프로레슬링과 UWA를 보고 '이대로 남아있어도 내 성장으론 이어지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EMLL의 기획부장이자 훗날 AAA의 대표가 되는 안토니오 페냐 씨의 스카웃을 받아 EMLL로 이적하기로 결의했다. 그것은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아사이는 일본에서의 속박에 질리고 또 질린 것도 있어 '일본보다 멕시코가 중요하다'라며 딱 잘라 UWA를 떠났다.



아사이는 페냐 씨로부터 가면 레슬러가 될 것을 지시받자, 사야마 사토루의 초대 타이거 마스크를 동경하기도 했고 가면 레슬러로 변신하고 싶다는 바램도 있었기에 가면을 쓰기로 결의하고 타이거 마스크로 변신하기를 희망했다.


이 시절엔 2대째 타이거 마스크도 가면을 벗고 미사와 미츠하루로 활동하고 있었으니 자신이 3대째 타이거 마스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냐가 원한 것은 용의 가면 레슬러였다. 페냐는 호랑이보다 용이 동양인의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했고, 페냐의 지시에 밀려 용 가면을 쓰게 되었다.




디자인은 시행착오를 한 결과 페냐가 디자인한 용의 가면을 착용했고, 이것이 울티모 드래곤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아사이를 SWS가 스카웃하려는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SWS는 경량급 부문을 만들기 위해 9월 30일에 SWS에서 부커였던 더 그레이트 카부키를 특사로 파견, SWS는 EMLL과 제휴를 맺고 아사이는 EMLL의 극동담당으로 SWS에 참전하게 되었으나, 일본에서는 아사이가 SWS로 스카웃 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아사이는 패트리시아 부인과 함께 귀국했을 때 SWS에 이미 이적해 있던 텐류 겐이치로와 함께 접촉했지만, SWS로 이적하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데 텐류에게 술을 권유받았을 뿐이었으나, 텐류의 인품엔 호감을 갖고 있었다.





10월 18일, 아레나 멕시코에서 아사이 요시히로는 '이소룡의 마지막 제자'라는 선전으로 울티모 드래곤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데뷔했고, EMLL의 에이스격 선수였던 옥타곤의 친구로서 활약해 점점 EMLL에서도 톱 에스트레이자 (*스페인어로 '톱스타')가 되어갔다.


울티모는 SWS 참전도 정식으로 결정되었으나, 어디까지나 EMLL의 선수로서의 참전이었고 소속 선수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SWS를 비난하던 주간 프로레슬링은 사정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사정을 알면서도 일부러 숨긴 것인지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을 옹호하고 아사이를 빼갔다고 하며 SWS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SWS의 사장이 되어있던 텐류가 혼자서 스포츠 평화당 사무소를 방문해 신마 씨와 회담을 했다. 텐류가 일부러 찾아간 것은 신마 씨가 울티모가 SWS로 스카웃되어 감으로서 히사츠네와 마이네스 대표의 체면이 망가졌다고 격노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기 때문이었지만, 텐류 본인도 SWS로 이적할 때 주간 프로레슬링의 비난을 받았기에 아사이에게도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아줬으면 한다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마 씨는 텐류가 홀로 일부러 방문한 것에 놀랐지만, 이야기를 나눔으로서 텐류의 인간성에 홀딱 반해버려 아사이에겐 책임을 지게 하기위해 유니버설에 참전시켜 '졸업 시합'을 치루게 하기로 결정, 아사이는 당당히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에서 졸업이라는 형태로 원만하게 떠나게 되었다.


10월 29일의 SWS 후쿠오카 대회에 아사이는 울티모로서 처음 참전했고, 대회에서는 히사츠네 대표가 나타나 격려, 11월 7일의 유니버설 고라쿠엔 홀 대회에 울티모가 특별 참전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11월 7일 고라쿠엔 홀 대회를 기해 아사이, 즉 울티모는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을 졸업하고 원만하게 단체를 떠날 수 있었으나, 시미즈 씨는 "아사이를 SWS에 인도했다"라고 하여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으로부터 취재 거부를 통보받아 아사이의 유니버설 프로레슬링 졸업 시합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인 신마 씨가 용서해도 히사츠네 대표의 마음 속에는 SWS로 간 아사이를 배신자로 보고 용서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은 멕시코 무사 수행 후 개선 귀국한 더 그레이트 사스케, 슈페르 델핀이 중심이 되어갔지만,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은 어디까지나 하마다를 에이스로 세웠다. 게다가 사스케를 시작으로 한 일본인 선수들의 대전료를 낮게 억눌렀을 뿐 아니라, UWA에서 계속 선수를 초빙해 왔으니 경영은 호전되긴 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또, 선수의 부상에 대한 대응도 대충이었고, 대전료 없이 참전을 강요당한 선수도 있었으니 하마다 이외의 일본인 선수들은 불만이 쌓여갔다.




거기서 사스케는 미치노쿠 프로레슬링 창설을 결의했지만, 어디까지나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의 도호쿠 지부로, 도호쿠에서 유니버설 프로레슬링 흥행을 펼치고 그 이윤을 선수들의 대전료로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마다를 제외한 선수들이 차례차례 미치노쿠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하자,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측과의 회담도 결렬되었기에 사스케는 독립을 결의.


하마다 한 명만 남은 유니버설 프로레슬링은 일단 활동을 중지하고 단체명을 'FULL'로 고쳐 다시 출발했지만, 몇 대회만 개최하고 자연 소멸. 하마다는 FULL의 선수로서 고향인 신일본을 거쳐 미치노쿠 프로레슬링에 합류했다.



UWA는 상설 경기장의 임대 문제도 발생, 게다가 페냐가 EMLL에서 독립해 AAA를 창설함으로서 선수들이 차례차례 AAA로 이적해 버려 한때는 멕시코를 능가했던 UWA도 단번에 약소 단체로 전락해버리게 되었다.




소규모면서도 새로운 상설 경기장으로 이전한 UWA였으나, 이번엔 마이네스 본인도 유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상설 경기장을 팔 수 밖에 없게 되었다. UWA는 부채가 계속 연쇄됨으로서 활동을 중지, UWA가 인정하던 각 타이틀만이 멕시코 뿐 아니라 일본에 정착하게 됨으로서 이름만은 제대로 남겼다.



울티모는 일본과 멕시코를 넘나들며 활약. SWS 분열 후에는 텐류를 따라 WAR 탄생에 참가했다.




신일본과의 대항전에서는 아사이 시절에 실현될 뻔 했었던 쥬신 썬더 라이거와의 대결을 펼쳤고, 엘 사무라이를 물리치고 IWGP 주니어 헤비급 챔피언 등극을 해냈다.




그리고 미국에도 진출해 WCW에도 참전하여 크루저급 타이틀도 차지했고, 멕시코에서 일본인 루챠도르 육성학교인 '토류몬'을 설립해 CIMA와 매그넘 TOKYO 등 다양한 인재를 배출했다.




1988년 7월에 부상당한 왼쪽 팔꿈치를 수술했지만, 수술은 실패로 끝나 울티모는 장기결장을 하게 되었다. 재기도 위험했으나 부활에 성공하고 WWE에도 진출, 그 후에도 오카다 카즈치카도 배출하며 후진 양성을 계속했다. 그리고 토류몬에서 독립한 DRAGON GATE가 울티모를 초빙해 최고 고문에 취임하게 되었고, 현재도 일본 뿐 아니라 해외도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다.





지금은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가 정점에 올랐을 때 더욱 높은 곳을 목표로 하기 위해 메이저리그로 이적하는 것이 당연해진 것처럼, 일본의 프로레슬러들도 더욱 높은 곳을 목표로 이적하는 케이스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것은 아사이 요시히로, 즉 울티모 드래곤이 그야말로 그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일본 스포츠 사 '그 이야기,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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