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Number Web 칼럼 '폭풍같이 살고, 칼날같이 싸우다. 다이너마이트 키드여 영원하라!'

이번에 번역한 일본의 스포츠 전문잡지 'Sports Graphic Number' 공식 사이트 'Number Web'의 프로레슬링 칼럼은 '폭풍같이 살고, 칼날같이 싸우다. 다이너마이트 키드여 영원하라!'입니다.


12월 5일에 세상을 떠난 다이너마이트 키드에 대한 추모 칼럼이었는데, 어떤 내용일지 보시죠.








타이거 마스크와 가혹한 싸움을 펼쳤던 키드.

대가는 컸지만, 링에 남긴 것도 많았다.




'폭탄 소년' 다이너마이트 키드가 자신의 60번째 생일날인 12월 5일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1980년대 전반에 공전의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킨 초대 타이거 마스크의 데뷔전 상대이자,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다이너마이트 키드.


당시 '월드 프로레슬링' 실황 중계 아나운서 후루타치 이치로 아나운서가 "전신이 날카로운 칼날!"이라고 칭한 것처럼 무시무시함을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와, 면도칼같은 날카로운 느낌의 파이트로 많은 팬들을 매료시켰다.


신장 173cm라는 작은 체구면서도 항상 전력으로 상대에게 공격을 걸고 전력으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냈다. 그 목숨을 깎아먹는 듯한 파이트는 지금도 전설로서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고, 전세계 레슬러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너무나도 과격한 파이트는 대가도 컸고, 은퇴 후에는 휠체어 생활을 하게되었으며, 말년에는 거의 누운채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있다.


프로레슬링 황금시대를 전력 질주했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떠났던 다이너마이트 키드의 레슬러 인생을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공전의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킨 계기.




다이너마이트 키드인 본명 토마스 빌링턴은 1958년에 영국 랭커셔 주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랭커셔 레슬링 트레이닝을 시작. '프로레슬링의 신' 칼 곳치와 '인간풍차' 빌 로빈슨을 배출했고, 만화 '타이거 마스크'에 등장하는 '호랑이 굴'의 모델로도 알려져 있는 '뱀 굴' 빌리 라이리 짐에서도 수행을 하고 16살 때 프로레슬러로 데뷔했다.


19살 때 캐나다의 명문 하트 가문에 스카웃되어 캘거리로 건너갔고, 그 과격한 파이트로 일약 현지 톱 레슬러가 되었다.


1979년 7월, 국제 프로레슬링에 참전하며 처음 일본 참전. 1980년부터는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참전해 1981년에 4월 23일에 타이거 마스크의 데뷔전 상대로 발탁되자, 이전까지 아무도 본 적 없을 명승부를 펼치며 다이너마이트 키드의 이름을 일약 세간에 울려퍼지게 했고, 타이거 마스크 인기 폭발도 되며 공전의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링 안팎으로 계속 '위험'하게 있었다.




타이거 마스크와의 일련의 시합이 그렇게나 인기를 끈 요인은 타이거의 화려한 공중기 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한상 긴장감이 가득찬, 스트롱 스타일의 진수라고도 할 수 있는 시합이었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링에 오를 때마다 키드로부터는 타협이 전혀 없어진다. 부상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험한 싸움을 하는 동시에, 거기에 상대가 대응하지 못하면 상대를 망가트리는 곳도 서슴치 않았다. 그렇기에 한 순간의 방심도 허락치 않는 긴장감 넘치는 시합이 된 것이다.


그리고 키드는 시합 이외에도 항상 팬들의 눈이 미치는 곳에서는 '폭탄 소년'으로 계속 있는 프로이기도 했다. 팬들 앞에서는 전혀 미소를 보이지 않았고, 싸인을 해달라며 종이를 내밀면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밟아버렸다.


입장할 때 관객이 함부로 경기복을 끌어 당기면 용서없이 때리러 덤빈 일도 한 두번이 아니다. 이것들은 전부 다이너마이트 키드로서의 위험한 이미지를 풍기기 위한 행동이었다.



*"몸이 펑크하는 전조는...."




그리고 키드는 자신이 키드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위험을 서슴치 않는 격렬한 파이트를 계속했다. 이런 시합의 연속은 키드의 몸을 차츰차츰, 그리고 확실하게 해쳐나갔다.


키드는 자신의 자서전에 "내 몸이 펑크할 전조는 타이거 마스크와의 대립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키드의 몸을 좀먹어 간 것은 너무 격렬한 파이트 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요인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근육 증강제) 를 시작으로 한 약물 남용이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 프로레슬링계는 헐크 호건을 대표로 하는 마쵸한 헤비급 레슬러의 전성시대. 지금은 생각못할 일이지만, 프로레슬링계에 스테로이드가 만연해 많은 레슬러들이 당연한듯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찰나같았던 키드의 삶의 방식.




1983년에 타이거 마스크가 은퇴한 후 라이벌을 잃은 키드는 전일본 프로레슬링 참전을 거쳐 1985년에 미국 최대 메이저 단체인 WWF와 계약했다.


체격이 작은 키드는 큰 레슬러에게 대항하기 위해 몸을 키울 필요가 있었고, 남들의 몇 배나 작법을 하기위해 낙법을 편하게 하기위한 근육도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스테로이드의 과다섭취가 시작되었고, 여기에 진통제도 함께 복용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버렸다.


게다가 미국 전국을 돌아다니는 힘든 스케쥴 속에서 가혹한 시합을 계속한 결과 1986년 12월, 키드의 몸이 마침내 비명을 질렀다. 시합 도중의 사고로 제4, 제5 추간판 단열이라는 중상을 입고 전선 이탈. 의사로부터는 은퇴 권고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키드는 아직 마비가 남아있는 동안 진통제를 맞으며 링에 복귀. 그리고 스테로이드를 맞음으로서 링에 오를 마음가짐을 끌어올렸다. 더이상 키드는 스테로이드가 없어선 안될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의 마음을 키드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부상을 당했어도 관객들이 내 이름을 외쳐준다면 그 기대엔 어떻게든 응해줘야 한다. 몸이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할 수 밖에 없다."


너무나도 찰나같지만, 그것이 키드의 삶의 방식이었다.



*프로레슬링도 가족도 33살에 잃고.




스테로이드는 키드의 몸 뿐만이 아닌 정신도 갉아먹었다. '불합리한 분노'라는 부작용으로 사생활에서도 극도로 공격적인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백 스테이지에서의 싸움 등 일상적으로 소동을 일으키게 된다. 게다가 추간판 단열 부상 이후 예전같은 격렬한 시합을 할 수 없게 되고 소동도 끊이지 않게 된 키드는 1988년에 해고나 마찬가지인 싸우고 결렬하는 것으로 WWF를 이탈했다.


그 후 전일본 프로레슬링 링에 복귀해 일본과 캐나다를 오가는 생활을 보내게 되지만, 키드의 시련은 계속된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성격의 격심한 변화에 버티지 못하게 된 아내 미쉘이 이혼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키드가 전일본 투어를 마치고 캐나다의 자택에 돌아오자 그곳은 빈 집이 되어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조국 영국으로의 편도 항공권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키드는 캐나다를 영원히 떠났고, 이혼이 성립되자 모든 재산을 아내와 자녀 3명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WWF 이탈 후 몸상태는 악화 일로였고, 1991년 12월 6일에 전일본 프로레슬링 일본 무도관 대회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이 당시 33살. 돈과 명예, 그리고 천직인 프로레슬링과 가족까지 잃게된 키드. 남은 것은 신체의 고통 뿐이었다.



*2016년에 찾게된 장소.




그 후 1993년에 영국에서 현역 복귀. 몸은 엉망이라 제대로 된 시합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만, 전 재산을 잃은 키드가 돈을 벌 수단은 프로레슬링 밖에 없었다.


1996년 10월에는 일본의 미치노쿠 프로레슬링에도 참전.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프로레슬링 활동을 재개한 초대 타이거 마스크와 재회했지만, 키드의 몸은 야위었고, 더이상 이전의 폭탄 소년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타이거와의 재회 시합을 끝으로 키드는 완전히 은퇴. 프로레슬링 관계자와의 연락을 완전히 끊고 프로레슬링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때문에 은퇴 후 키드의 근황은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는데, 2016년 10월에 NHK의 '어나더 스토리즈 운명의 분기점'에서 타이거 마스크를 다루었을 때 방송 스텝은 키드가 살고있는 장소를 찾는데 성공. 현재의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키드는 2013년에 중증 뇌졸증에 걸렸고, 말년에는 요양 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곁에는 지금의 아내 도트의 모습이 있었다. 키드가 은퇴한 이듬해, 두 사람은 만나고 결혼. 아내는 키드가 유명한 프로레슬러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렇기에 링을 떠난 키드가 마음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 키드는 아내 도트와의 만남으로 마침내 토마스 빌링턴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고향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겨우 10년 동안의 짧고 굵은 현역 생활.




키드가 보이는 무대에서 활약한 것은 겨우 10년 조금 더였기에 너무나도 짧았지만, 그 후의 프로레슬링계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크다.


일본의 쥬신 썬더 라이거를 시작으로, 1980년대 후반 이후 세계 주니어 헤비급 레슬러들은 거의 모두가 키드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고있다.


그리고 작은 체구라도 헤비급의 세계 톱으로 싸우는 키드가 만든 길은 그 후 제자이기도 한 크리스 벤와가 계승했고, 현재의 톱 AJ 스타일스와 케니 오메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이너마이트 키드는 폭풍처럼 격렬하게 살고, 앗 하는 사이에 우리들의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키드가 남긴 유전자는 지금 전세계에 퍼져있고, 앞으로도 쭉 프로레슬링계에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다이너마이트 키드여, 영원하라!



글쓴이: 호리에 간츠(堀江ガンツ)


1973년 1월 21일, 도치기 현 출생.

'종이의 프로레슬링 RADICAL' 편집부를 거쳐 2010년부터 FREE가 되었다.

WOWOW에서 'UFC -궁극 격투기-', BS 스카파!에서 'PRIDE 헤리티지 등으로 격투기의 TV 해설도 맡고있고, 현재는 'KAMINOGE', '공'을 중심으로 집필.



*원문 & 사진출처: https://number.bunshun.jp/articles/-/832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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