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애니멀 하마구치가 말하는 '국제 프로레슬링이란 무엇인가?' -4. '하마구치 헤이고에서 '애니멀 하마구치'로. 마침내 야수 탄생'

이번에 번역해 본 칼럼글은 일본의 스포츠 종합잡지 '스폴티바'의 공식 웹 사이트인 'web Sportiva'에서 2017년에 새롭게 연재를 시작한 '국제 프로레슬링'에 대한 칼럼 제4편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 칼럼 시리즈의 주인공인 애니멀 하마구치가 지금의 링 네임이 된 이야기였는데, 과연 어떤 내용이었을지 보시죠.





국제 프로레슬링에 입단한 하마구치 헤이고는 겨우 한 달만에 프로레슬러로서 데뷔했다.


하지만 데뷔전 결과는 설마했던 반칙패.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공전절후의 드문 일'이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본인 왈 '아마추어에 털도 나지않은 신인'은 그 후 국제 프로레슬링에 착실하게 지반을 굳혀나간다.



*'애니멀'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요시하라 이사오 (3)





현역 시절의 애니멀 하마구치



혼고 세이키치, 사노 아사타로, 무라사키 오니조 등의 신예 레슬러와의 대회 전반부 시합을 거듭하며 조금씩 두각을 보여온 하마구치는, 그 다음 상위 시합에 기용될 기회를 얻게된다.


그러자 국제 프로레슬링 사장인 요시하라 이사오로부터 링 네임을 받았다.


'애니멀 하마구치'.


하마구치는 데뷔 이듬해인 1970년부터 링 네임을 '애니멀 하마구치'로 바꾸고 링에 올랐다.


스트롱 고바야시, 썬더 스기야마, 그레이트 쿠사츠, 럿셔 기무라, 마이티 이노우에 등처럼, 강해보이는 가타카나 글자의 닉네임 + 이름 한자로 이뤄진 국제 프로레슬링 스타일의 링네임이다.


"기뻤죠. 이전까진 '미스터 하마구치'라던가 '하마구치 효고'라는 링 네임도 있었지만, 사장님께 직접 링네임을 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니와 트레이닝 센터 시절부터 하마구치는 '연습벌레'라 불렸고, 국제 프로레슬링 입단 후에도 아무튼 연습에 매진했다. 그 연습량은 프로레슬링계에서도 돋보였고, '애니멀'이라는 링 네임은 동물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붙었다는 설도 있다.


"확실히 자주 연습했죠. '바보'라고 할 정도로 연습했으니까요. '국제 프로레슬링의 도장을 엿보면 반드시 하마구치가 있다'라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요시하라 사장님께 '어째서 애니멀인가요?'라고 그 이유는 여쭤보지 못했지만, 전 '야수처럼 강하고 용맹해져라'라는 가름침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은 몸을 나타낸다'라는 말도 있는데, 링네임이 '애니멀'이 되었으니까 전 점점 야수가 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이 있는거죠.

그건 1997년, 프랑스 클레르몽페랑에서 열린 여자 아마추어 레슬링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있던 일입니다. 딸인 쿄코가 처음 세계 챔피언이 된 대회였죠.


최중량인 75Kg급에서의 준결승전 때 쿄코의 상대는 중국의 리우동펭 선수였죠. 그때까지 세계 선수권에 5번 출전해 전부 우승을 차지한 강적으로, 리우 선수를 이기지 못하면 우승은 없을 사실상의 결승전이었습니다.

시합에 나서는 쿄코에게 전 '야수가 되라!'라고 외쳤습니다.

인간은 아슬아슬한 상황이 되면 그 몸의 본질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제가 연마해온 것, 애니멀 하마구치의 모든 것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제 외침을 듣고 쿄코도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야수의 눈으로 상대를 노려봤고, 멋지게 폴 승을 거두었습니다. 남은건 결승전, 전 다시 한 번 쿄코에게 말했습니다.

'등산으로 치면 지금은 아직 9부 능선이다. 우리들은 우승하기 위해 해왔다. 리우 선수를 쓰러트렸다고 해도 여기서 들뜨면 안된다.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다시 한 번 죽을 각오로 힘내라!'

쿄코는 다시 야수가 되어 미국의 크리스티 스턴그렌 선수에게 4 대 0으로 승리하고 첫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모든 것이 통했습니다. 요시하라 사장님께 받은 '애니멀'이라는 링 네임이 담긴 생각, 그 가르침이 절 통해 딸에게 일직선으로 전해졌죠..."



이야기를 조금 되돌리자.


1966년 10월, 요시하라가 일본 프로레슬링을 퇴직하고 국제 프로레슬링을 만든 10월 5일 시점에서 일본에 존재하는 프로레슬링 단체는 1963년에 세상을 떠난 역도산이 만든 일본 프로레슬링 하나 뿐이었다.


15년 동안 무패를 자랑했던 프로 유도선수 기무라 마사히코가 이끄는 국제 프로레슬링단 (요시하라의 국제 프로레슬링과는 다른 단체), 마찬가지로 유도 출신인 기무라에 이은 넘버 2 야마구치 토시오가 설립한 전일본 프로레슬링 협회 (훗날의 전일본 프로레슬링과는 다른 단체)는 모두 소멸.


1주일 후인 10월 12일, 일본 프로레슬링 사장직에서 해임당한 도요노보리가 안토니오 이노키를 끌어들여 도쿄 프로레슬링을 만들지만, 이것도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분열되고 사라졌다.


요시하라는 자이언트 바바를 가진 톱 단체 일본 프로레슬링에 필사적으로 대항하려 했다.



"사장님은 일본 프로레슬링에 싸움을 걸었다.... 아니군요. 더욱 크게 일본의 프로레슬링계를 바꾸려 하셨던게 않을까 합니다.

요시하라 사장님은 사실 머리가 좋은 분이셨습니다. 저같은 녀석도 이야기를 나눌때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뇌명석.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발상을 하셨죠. 사장님은 국제 프로레슬링을 만들고 다양한 것을 시작하셨습니다.


문서로 선수와 계약을 하는 것도 일본 프로레슬링계 최초였고, 리그전에서의 '배드 마크 방식'도 도입하셨죠.

리그전이지만 패배와 무승부를 기록하면 처음 갖고 시작했던 점수에서 감점이 되고, 마지막에 가장 많은 점수를 유지한 선수가 우승하는 시스템입니다. 이러면 소화 시합은 없어지고 좋은 대진표가 늘어납니다. 아마추어 레슬링에 있던 방식이죠.


일본인 정상급 선수끼리 대결한다는 것도 최초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역도산 선생과 거물 외국인 선수의 싸움이 메인이었으니까요.


또, 경기장에 음악을 트는 것, 선수 입장 테마곡을 정한 것도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참고로 제 테마곡은 히노 테루마사 씨가 부른 '마타도르' 등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철장 데스매치를 한 것도 국제 프로레슬링이 최초였습니다. 럿셔 기무라 씨는 닥터 데스를 상대로 일본 최초의 철장 데스매치에서 승리해 (1970년 10월 8일. 오사카 부립 체육관), 그 후 '철장 데스매치의 귀신'이라 불렸습니다.

그레이트 쿠사츠 씨를 '체인 데스매치의 귀신'으로 하려던 이야기도 있었다는 것 같습니다.


전용 버스도 획기적이었죠. 정말 편했습니다. 의자를 눕히면 정말 편히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먼 곳은 비행기와 열차로 이동했습니다.

지금은 왠만한 단체라면 어디든 전용 버스를 갖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국제 프로레슬링만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정말 저희 선수들을 생각해 주시고 소중히 여겨주셨습니다.


사장님은 아이디어 맨이셨고, 선견지명이 있으셨죠. 그런가... 일본 프로레슬링에서 영업으로 일하셨으니 그때 고생하며 배운 게 있으셨겠군요.

하지만 '영업맨'이라고 하면 실례지만 언변이 뛰어나다던가하는 그런 이미지가 있지만, 요시하라 사장님은 그런 면이 전혀 없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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